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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매니저

등록일2016-06-15

조회수20,457

제목

조선족 입주 도우미 ‘이모님’

 

[토요판] 인터뷰 ; 가족  /  한겨레

 조선족 입주 도우미 ‘이모님’

▶ 육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맞벌이 부부가 조선족 입주 도우미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입주 도우미는 ‘이모님’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돌보고 맛있는 음식을 만듭니다. 조선족 이모님은 어떻게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왔을까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방인’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까요. 이모님의 남편, 자녀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지우 아빠는 새로운 가족 ‘이모님’과 인터뷰를 나눴습니다. 가족은 혈연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니까요.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한달여 앞둔 어느 날, 아내가 육아도우미를 구하자고 했다.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지우가 태어나기 전부터 처가와 같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하며 육아에 손을 벌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지만, 막상 복직 날짜가 다가오자 부모님에게 육아의 부담을 지우는 것이 자식 된 도리는 아니라는, 부모님도 부모님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출근은 빠르고 퇴근은 알 수 없는 회사의 특성상 아예 입주 도우미를 구하기로 하고 지금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조선족 육아도우미와 1년 남짓 같이 살고 있다.

 

좁은 집에서 남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걱정은 곧 사라지고 불편함은 금방 적응되었다. 이북 사투리를 간간이 쓰시지만 아이를 돌보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아이를 돌보는 와중에 부지런히 집안일도 해주시고 담백하고 정갈한 음식 솜씨도 수준급이다. 아주머니 잘 만나는 것도 오복 중의 하나라는데 우리는 정말 복이 많았다.

 

그렇게 한솥밥을 먹고 화장실을 같이 쓰며 ‘또 하나의 가족’으로 지내오면서 나는 문득 이모님에 대해, 그리고 이모님의 뿌리인 조선족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뉴스에 나오는 오원춘과 박춘봉 같은 흉악한 사람들이 아닌, 그냥 이모님과 같이 평범한 조선족이 궁금해졌다. 내년에 환갑이 되시는 이모님은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출신의 중국 국적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족이다.

  

1년 남짓 한집 사는 ‘이모님’
흉악한 뉴스 보다 궁금증 일어
아들딸 생이별하고 타향살이
눈에 밟혀 어찌 지내셨을까

 

돌보던 아이 자라 입학하거나
비용 부담 탓에 나오기도
오늘도 지우는 이모님 찾는데
미래의 이별 감당할 수 있을까

 

한국에는 언제 처음 오셨어요?

 

이모님 1996년이었어요. 한-중 수교 이후에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죠. 일자리도 많고 월급도 중국보다 훨씬 많았으니까요.

 

혼자 오셨어요? 96년이면 아이들도 초등학교 다닐 때 아닌가요?

 

이모님 딸이 중학교 1학년,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데리고 들어올 수가 없어서 남편이랑 둘이 왔죠. 딸은 고모 집에, 아들은 할머니 댁에 맡겼어요. 애들 다 떼놓고, 모질었어요 참….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서도 퇴근할 때까지 지우가 눈에 자꾸 밟히는데… 중국에서 한국까지 생이별을 한다는 게 저로서는 상상이 안 가네요.

 

이모님 한국에 가면 몇 년씩 중국에 못 돌아갈 각오 하고 나와야 하는데… 매일 울었어요. 애들 보고 싶어서… 근데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리고 사는 게 한국이 훨씬 나았으니까, 나중에 데리고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도 그 아이들이 잘 커서 학교 졸업하고 지금 중국에서 회사 다니고 사업하고 잘 살고 있어요.

 

자제분들이 저와 같은 또래지만 참 대견하네요. 저 같으면 부모님이 외국에 일하러 가시고 친척집에서 눈칫밥 먹으면서 그렇게 못 살았을 것 같은데. 한국에서는 무슨 일 해보셨어요?

 

이모님 처음에는 식당 일부터 했어요. 여자들은 주로 식당에서 일하고 남자들은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죠. 건설현장이 벌이는 괜찮은데 힘들어요. 농사일을 돕거나 간병인으로 일하는 사람도 많아요. 식당 일을 10년 정도 하다가 비자 사정이 좀 나아지면서 육아도우미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중국과 러시아 동포는 방문취업비자(H-2) 혹은 재외동포비자(F-4)를 발급받아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다. 내국인과 거의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는 F-4 비자와는 달리, H-2 비자는 상대적으로 저임금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의 동포들이 정부가 지정한 38개 단순노무직에 종사할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특별비자다. 하지만 이모님이 처음 한국에 오셨던 90년대에는 방문취업비자(H-2)라는 것이 없었다. 중국동포들이 F-4 비자를 받기도 어려워 대부분 3개월 단기체류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가슴을 졸이며 일하다가 걸리면 중국으로 추방당하곤 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에 와서야 3년짜리 H-2 비자가 생기고 조건에 따라 연장을 하거나 F-4 비자로 전환이 가능해진 것이다. 육아도우미 일을 시작하신 것은 불법체류자 신분을 벗은 그즈음부터였다.

 

아무래도 다른 일들보다 육아도우미는 신분이 확실해야 하니까 그런가 보네요.

 

이모님 그렇죠. 옛날에는 일하다가 중국으로 쫓겨나는 조선족도 많이 있었어요. 옆 가게에서 장사가 잘되면 그 집에 불법체류자가 있다고 신고하고 그랬죠. 저도 조마조마하면서 15년 가까이 버텼는데 다행히 식당 주인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이 착해서 신고당한 적은 없었어요.

 

중국으로 추방당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가요?

 

이모님 한번 추방당하면 돌아오기도 힘들고… 처음 한국 들어왔을 때 브로커 비용으로 중국돈 12만위안을 내고 나왔어요. 쫓겨나면 그냥 죽는 거예요. 갚을 방법이 없거든요. 12만위안이면 당시 한국돈으로도 천만원이 넘는 액수인데… 한국에 일하러 오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돈이 없으니까 그 돈을 빌려서 마련하죠. 근데 정작 한국 정부에서는 3개월짜리 단기체류비자밖에 안 내주니까 그 돈 갚을 때까지 일하려면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와… 그렇게 15년을 버티신 거예요?

 

이모님 애들 낳을 때 제대로 조리를 못해서 원래 위가 안 좋고 두통도 잦았는데 그때 스트레스 때문에 더 심해졌죠. 그래도 겨울에 영하 40도까지도 내려가는 흑룡강보다는 따뜻한 한국에 오니까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요.

 

이모님의 부모님은 어느 지방 출신이셨나요? 일제 때 강제이주되거나 독립운동했던 분들의 후손이 지금 조선족의 상당수를 이루고 있다고 하던데, 혹시 부모님이나 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였나요?

 

이모님 할아버지가 함경북도 출신 독립군이셨어요. 60살 넘어서야 중국에서 독립운동 유공훈장을 받았죠. 아버지는 독립운동 유공자로 매달 60위안 정도 지급받았는데, 마을에서 공산당 당대표를 10년간 지내셨어요.

 

독립군 집안이셨군요.

 

이모님 뭐 다 옛날 얘긴데요.

 

지우가 몇 번째 돌보시는 아이죠?

 

이모님 네 번째예요. 지우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예요. 근데 아직도 보고 싶고 가끔 사진도 들여다보고 꿈에 나오는 애들이 있어요. 그애들도 저를 많이 찾는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군요. 육아도우미 일 하시면서 그런 일이 좀 힘드시겠어요.

 

이모님 네. 아무래도 애들이랑 헤어질 때. 그 집이랑 안 맞아서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아이가 커서 학교에 입학하면 육아도우미가 필요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비용이 부담돼서 그러는 경우도 있죠. 그러면 몇 년씩 정 주고 키웠던 애들이랑 생이별을 해야 하니까… 너무 슬프죠. 얼마 동안은 연락하고 지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집 들어가면 사실 다시 보기는 어려워요.

 

애들한테도 충격이 크겠어요.

 

이모님 그렇죠. 근데 저는 지금 지우네가 너무 좋아요. 전에 머물던 집들 중에는 인격적으로 대우를 안 해주거나 은근히 무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근데 지우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다들 이렇게 인간적이고 따뜻한 집이 없었어요.

 

저희는 그냥 상식적으로 대하는 것뿐인데… 그렇게 봐주시니 제가 감사하네요. 또 어떤 점이 힘드셨나요, 그동안?

 

이모님 예전에는 불법체류 신분이다 보니 의료보험이 안 돼서 아파도 병원에도 잘 안 가고 감기라도 한번 걸려서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 병원에 가면 몇만원씩 깨지고 하니까. 근데 정식으로 비자 받고 일하고 나서는 매달 10만원 정도 의료보험료 내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고 있어요. 많이 좋아졌죠.

 

조선학교에서 북한의 표준어이자 조선족의 기준어인 문화어로 교육받고, 조선족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평생을 지내신 이모님은 중국어보다 우리말이 더 익숙하다. 20년을 한국에서 살다 보니 이제는 중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한국으로, 일본으로, 빠르게 도시화되고 있는 중국의 신도시들로 빠져나가며 공동화되고 있는 조선족 자치주에는 이제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도, 마땅히 할 일도 없다.

 

지우는 오늘도 이모님을 찾는다. 아빠한테 혼나면 울면서 이모님에게 달려간다. 지우처럼 이모님의 존재가 큰 아이한테 언젠가 닥치게 될 이모님의 부재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모님, 건강하시고 더 행복하시고 지금처럼 지우 잘 돌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직 먼 얘기 같지만 우리 사정으로 혹은 이모님의 사정으로 또 하나의 가족을 떠나보내야 할 날이 오겠죠. 그래도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명절이면 모이듯 일 년에 몇 번씩은 꼭 만나요.

 

지우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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