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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3-07-16

조회수13,263

제목

"100점 육아도우미" 바라는" 70점 엄마들"

 

하나의 가족-중국동포 입주육아도우미
(직장맘으로 겪은 7명과의 만남과 이별 ....가지 마요, 이모~~ )

 

영유아를 키우는 ‘직장맘’에게 최대의 복이 뭔지 아세요? ‘남편복’도 아니고 ‘시가복’도 아니고 ‘도우미복’이랍니다. 마음에 잘 맞고 신뢰할 만한 도우미는 직장맘에게 친정엄마 이상의 든든한 우군입니다.

 

영유아를 키우는 직장맘의 일상은 전쟁 그 자체입니다. 회사 출근하기도 바쁜데, 아직 제 몸을 건사하지 못하는 아이는 엄마의 보살핌을 많이 필요로 합니다. 집안일은 끝이 없고 티도 잘 안 나지요. 이런 상황에서 좋은 도우미를 만나 가사·육아의 고통을 분담하면 직장맘의 행복지수는 쭉 올라갑니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지요.

 

저는 6살, 4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직장맘입니다. 시가와 친정 모두 먼 지방에 있고, 부부의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아 입주 도우미(베이비시터라 부르고, ‘이모’라는 호칭으로 주로 부릅니다)와 함께 삽니다. 첫째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둘째는 어린이집 대기 상태입니다. 입주 도우미는 한국으로 돈을 벌러 온 중국동포(조선족)들이 많이 합니다. 국내 체류 외국인 130여만명 중 중국동포는 50여만명으로 우리 인구의 1%를 넘었다지요. 입주 도우미는 한국인은 거의 없는데다 비용이 비쌉니다. 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5년 동안 7명의 중국동포 도우미를 만났고, 그들과의 만남과 이별 속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얼마 전 둘째 아이를 2년 가까이 돌봐주신 도우미께서 제게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저희 가족에겐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그분과 헤어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중국동포 도우미들을 만나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해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들이 제게 말해준 ‘무개념 한국인’들과 그들이 말하는 ‘도우미로서 살아가는 고충’에 대해서도 전하고자 합니다. 또 입주 도우미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직장맘이 겪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도 얘기해보려 합니다. 육아 도우미와의 만남과 이별 속에서 가족을 만들고 해체하고 또 가족을 재건하는 저의 생생한 ‘21세기 다문화 신가족 체험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만남에서 이별까지

 

“세 끼만 제대로 먹게 해줘”
2년 전 중국동포 이모와의 만남
같이 밥 먹고 비자 변경을 돕고
이모 가족에게 집도 빌려주면서
신뢰와 추억이 쌓여갔다

 

“결혼한 딸 곁에서 살고 싶어”
친정엄마 같던 이모의 이별 통보
실연당한 듯 눈물이 쏟아졌고
아이들은 불안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보내주어야 했다
가족이 다시 해체되는 순간이다

 

 육아도우미, 간병인 등 돌봄노동 시장에 중국동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낮은 임금, 불안정한 고용환경, 비인간적인 대우 등 열악한 일자리이기 때문이지요.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이들을 ‘새로운 가족’, ‘제3의 가족’이라고 불러도 좋을까요?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로 돌봄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저는 세 끼 제대로 먹게 해주면 돼요. 더 바라지도 않아요.”

 

쉰을 갓 넘긴 아주머니는 북한식 어투로 내게 공손하게 말했다. 소처럼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을 가졌고, 외모로 봐서는 점잖은 중년 한국인 아주머니 같았다. 육아휴직 중이던 2011년 6월, 집 근처 카페에서 방아무개 이모(편의상 ‘이모’라는 호칭으로 쓰겠다)를 면접했다. 남편은 사별을 했고, 딸 둘을 혼자 힘으로 키웠다고 했다. 딸들은 중국에 있고, 본인은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토요일 근무도 가능했고, 세 끼 제때 먹게만 해주면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다 했다. 주 5일제인지, 공휴일은 쉬는지, 월급은 얼마인지, 엄마 아빠 식사는 하는지, 엄마 아빠 출퇴근 시간은 몇 시인지,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는지 등등 꼬치꼬치 조건을 따지는 요즘 이모들과 많이 달랐다. 이전 집에서 너무 마음고생 몸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눈칫밥은 먹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사정을 들어보니 내가 들어도 화가 났다. 이모가 일한 이전 집은 쌍둥이 신생아를 돌봐야 하는 집이었고, 엄마가 집에 있었다고 한다. 쌍둥이를 돌보는 것이 쉽지 않은데다 이 집의 엄마는 집안일을 지속적으로 시켰다고 한다. 그것도 끼니를 건너뛰면서.

 

“자기는 아침에 몸에 좋은 주스 먹고 선식 같은 것도 먹어요. 남편도 주스 갈아서 먹여 보내고요. 자기들은 먹을 것 다 챙겨 먹어요. 그러고는 아침 생각 없다고 하면서 저한테는 일을 시켜요. 아침도 쫄쫄 굶어 가면서 일을 하다 오전 11시가 되면 너무 배가 고파 ‘아침 안 먹냐?’고 물었죠. 그런데 이 엄마 창고에 처박혀 있던 선풍기를 꺼내다가 씻으라는 거예요. 너무 열이 올라 ‘일을 시켜도 밥을 먹이면서 시켜야 하지 않냐’고 소리치고 나왔다니까요. 이러다 곧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먹는 문제처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의식주는 생활의 기본이다. 나는 먹는 것에서 우리의 식사와 도우미의 식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먹는 음식을 똑같이 그분들도 함께 먹고, 시골에서 맛난 음식이라도 올라오면 함께 먹었다. 식비가 더 들어가더라도 이모와 한솥밥을 먹는 식구처럼 지내면, 좀더 서로를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모들은 그런 ‘대접’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모들은 같은 밥상에서 밥 먹기를 꺼렸고, 설사 같이 먹더라도 갈치나 조기 같은 생선에는 알아서 젓가락을 대지 않는다. 김치나 남은 반찬을 주로 먹는다. 자신은 밥 양도 많지 않은 편이라고 은근슬쩍 말하는 이모도 있다. 쌀을 많이 축내지 않는다는 표시일 게다. 고기를 구우면 상추쌈을 싸먹지 않아 내가 직접 싸줘야 몇 번 받아드실 정도였다.

 

우리집에서 일했던 이모들 대부분 위염 증세가 있었다. 눈칫밥을 먹고,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하다 보면 끼니를 제때 못 챙겨 먹는 경우가 많아서다. 한 이모는 내게 “자기들은 달걀이며 먹을 것 다 먹고 나는 딱 김치 하나만 놓고 밥을 먹도록 해 화가 나서 일을 그만뒀다”고 전했다. 이모들이 우리집에서 가장 만족스러워했던 점은 가족처럼 대해주고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면접 때 ‘세 끼 제때 챙겨 먹는 것’을 강조한 방 이모의 말이 너무 강렬하게 의식에 남아 나는 지금도 이모 밥을 가장 우선적으로 챙긴다. “이모 식사하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는 거르지 마세요~ 이모가 건강해야 우리 아이들도 잘 키울 수 있어요.” 이런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사랑과 관심이기 때문이다.

 

 무개념 도우미로 인해 탈모증상 생긴 적도

 

 아이를 맡기는 부모나 아이를 돌봐주는 이모들도 서로를 신뢰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워낙 중국동포 도우미와 관련한 각종 나쁜 뉴스와 소문, 악성 괴담이 많기 때문이다. 몰래 녹음을 해봤더니 이모가 아이를 때리고 아이에게 욕을 하는 소리가 녹음됐다는 인터넷 카페 글, 중국동포 도우미가 아이를 납치해 장기매매를 했다는 괴담, 이전 집에서는 옷이나 가방을 사줬고 명절 때 어떤 선물을 줬다는 식의 말로 엄마에게 각종 스트레스를 주는 사례 등등 피가 거꾸로 치솟을 만한 얘기는 널리고 널렸다. 오죽하면 인터넷 한 카페에서는 중국동포 도우미 블랙리스트까지 작성해서 한국인 엄마들끼리 공유했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중국동포 이모와 함께 살고 있는 나의 마음은 덜컥 내려앉곤 했다.

 

실제로 개념 없는 도우미를 만나 마음고생을 해본 적도 있다. 딸을 낳고 육아휴직을 한 뒤 회사에 복귀하기 두 달 전 입주 도우미를 구해 아이와 적응을 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출근하기 일주일 전 이모가 “허리가 아프다”며 일을 그만두겠다 했다. 회사는 복직해야 하는데 당장 사람을 구해야 하는 나는 제대로 따져보지 못하고 다음 도우미를 구했다. 부랴부랴 급하게 사람을 구해서였을까. 두 달째 들어 서로 익숙해질 즈음, 입주해서 일하는 도우미가 밤에 자꾸 나가려 했다. 찜질방을 다녀오겠다, 친구 만나고 오겠다 등등 이유는 다양했다. 저녁나절 전화가 오는데 옆에서 들으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가끔 집에 없던 풍선 등을 가지고 있어 누가 줬냐고 물어보면 “할아버지”라고 말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하루는 일하다 낮에 전화를 해보니 도우미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너무 걱정돼 남편이 일하다 말고 집으로 가봤더니 도우미는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볼일을 보고 저녁나절 늦게 들어왔다. 그즈음 딸은 갑자기 자면서 머리 양쪽을 뽑기 시작했는데 마치 탈모 증상 같았다. 말 못하는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모에 대한 신뢰가 없어졌고, 이모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이렇게 지난 5년 동안 도우미 7명을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다 보니 이모들을 대하는 나만의 원칙도 생겼다. 첫째로 이모들도 사람이고, 노동자이고, 고생 많이 한 우리네 엄마나 이모의 또다른 모습이니 인간으로서 대우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로 공동 생활규범과 양육 원칙을 만들어 서로 잘 지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나도 못하는 ‘완벽한 육아와 살림’을 도우미에게 바라지 말아야 한다. 100점이 아니라 70점 정도만 해도 만족하고 서로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 엄마들은 ‘무개념 중국동포 이모’ 사례들에 공분하지만, 이모들 역시 ‘무개념 한국인 주인’에 대해 많이 얘기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가족과 잘 맞지 않고 규범을 잘 지키지 않는 이모라면 빨리 결단을 내리고 잘 맞는 사람을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봐 우물쭈물하다가 스트레스 더 받고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내가 한국 집에서 일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젊은 남자와 함께 잤지 뭐야. 부인이 자라고 한다고 또 내 방에 와서 자는 남편은 뭔지…. 아이 아빠가 문 앞에서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으면 한밤중에 잠에서 깨서 화장실 가고 싶으면 아빠를 발로 툭툭 건드려. 그러면 아빠가 살짝 비켜줘. 잠도 맘대로 자지 못하고 화장실도 그렇게 갔다니까. 믿어지지 않지?”

 

방 이모가 헛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사연은 이렇다. 방 이모가 이전에 일한 집에서는 직장맘이 아이를 데리고 자면 너무 피곤하다며 이모보고 아이를 함께 데리고 자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그 집 부부는 이모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다. 자는 동안 아이에게 어떻게 할지 모른다며 아내는 따로 자고 남편이 이모와 아이가 자는 방에서 함께 잤다고 한다. 잠을 자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모는 결국 그 집을 나왔다고 했다.

 

이외에도 7명의 도우미 이모들은 이전에 자신이 겪은 ‘황당한 집주인’ 얘기들을 종종 들려주었다. 그들이 말하는 ‘무개념 한국인’의 유형은 다양했다.

 

월급을 제때 주지 않고 계속 도우미가 교체되는 가정, 시부모나 친정 부모가 시시때때로 와서 아이 보는 일부터 집안일까지 감시하고 간섭해 도우미를 질리게 만드는 가정, 식모 대하듯 취급하고 마치 더러운 사람 취급 하며 아이에게 뽀뽀하거나 스킨십 하는 것을 싫어하는 가정, 부부싸움을 밥 먹듯 하면서 아이 문제는 모조리 이모에게 떠미는 가정, 남편이 도우미에게 말을 거는 것을 싫어해 괜히 남편과 도우미의 관계를 의심하는 가정, 물건이나 현금 등을 잃어버리면 도우미를 의심하는 가정, 겨울에 이모 방은 난방을 거의 하지 않고 이모 반찬은 최소화해서 눈칫밥을 주는 가정, 아이가 조금 다치면 도우미가 제대로 돌보지 않아 다친 것처럼 몰아가는 가정 등등 별별 사례가 많았다. 이모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하는 ‘도우미로서의 고충’은 엄마뻘 되는 이모들을 마치 식모 대하듯 하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부분이었다. 어떤 이모는 “어떻게 보면 애기 엄마들은 딱 내 자식뻘 되는데 그런 사람들이 나를 식모 대하듯 하고 중국동포라면서 무시하면 마음속에 큰 응어리가 남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모는 “호칭도 어떤 가정은 ‘사모님’ ‘사장님’으로 깍듯하게 불러주기를 바라서 아예 사장님, 사모님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그런 얘기들을 들으며 나는 고용주로서의 나,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가족으로서의 나를 좀더 객관화하면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곤 했다.

 

지난해 3월1일 놀이공원으로 가족나들이를 갔다. 이모와 아들 민규, 엄마와 딸 민지가 짝을 지어 눈썰매를 탔다. 남편은 사진을 찍었다.

출입국사무소에 함께 가 비자문제를 돕다

 

 “아이참… 딸 결혼식을 하면 중국에서 친척들이 몽땅 오는데 그 사람들을 데리고 모텔로 갈 수도 없고….”

 

지난해 추석 때쯤, 이모의 첫째 딸이 한국에 들어와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 일이다. 이모가 한숨을 푹푹 쉬며 내 앞에서 걱정을 했다. 딸 결혼 준비를 해야 했기에 토요일 근무도 빼드리고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참이다. 젊은 나이에 이혼을 하고 홀로 딸을 키워 홀로 내 결혼 준비를 하셨던 친정엄마의 모습이 겹쳐져 잘해주고 싶었다. 마침 우리는 추석을 맞아 집을 비우게 되는 시점이었다.  

 

“이모~ 뭐가 걱정이에요~ 저희 추석 때 시댁 가잖아요. 어차피 집 비우는데 우리집에서 친척들과 따뜻하게 밥 한 끼 하세요~ 딸도 다시 중국으로 출국해야 하는데 딸이랑도 좋은 시간 보내셔야지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그렇게 해준다면야 나야 너무 고맙지요. 진짜 그렇게 해도 될까요? 내가 집 청소도 깨끗하게 해놓을게. 진짜 우리 민지 엄마 최고다. 진짜 이런 주인 없을 거야. 나는 교회 가서 만날 자랑한다니까~ 우리집 엄마는 나를 이렇게 생각해준다고. 우리집 애들 자랑도 많이 하고.”

 

이모는 그렇게 첫째 딸 결혼식을 잘 치렀고, 우리집에서 두 딸, 친척들과 오붓한 시간들을 보냈다. 두 딸은 각자 남편을 데리고 우리집을 따로 방문해 우리 부부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들의 손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렌지 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모는 이런 나의 배려에 감사해했고, 그만큼 우리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깊어갔다.

 

딸 민지와 이모가 회전목마를 함께 타며 즐겁게 웃고 있다.

우리 가족은 이모와 함께 많은 추억을 그득그득 쌓았다. 함께 놀이공원도 가고, 온 가족이 함께 눈썰매를 타러 가기도 했다. 꽃구경을 가고, 돌사진도 함께 찍었다. 이모는 때로는 내게 친정엄마와 같은 역할을 해줬다. 남편하고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내 속마음을 속시원하게 털어놓고 남편 흉을 함께 보기도 했고, 밖에서 힘든 일 있을 때면 이모와 얘기하며 마음을 풀기도 했다. 내가 몸이 아프면 이모는 친정엄마처럼 전복죽을 끓여주셨다. 야근을 해야 하고 주말에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부담없이 이모에게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이모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그런 이모였기에 나는 이모가 해결하기 힘들어하는 일이 있으면 발벗고 나서 도왔다. 비자 문제도 그랬다. 방 이모가 우리집에 오실 때는 방문취업(H-2) 비자였다. 방문취업 비자는 5년 만기가 되면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일정기간 재입국 유예기간이 있어 장기 체류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가사도우미로 1년 이상 같은 집에서 근속한 방문취업 동포에게 장기 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 자격(F-4)을 부여했다. 나는 고용지원센터에 가서 이모와 1년간의 고용계약을 맺었고, 1년이 지난 시점에 이모는 출입국사무소에 가 비자를 변경할 수 있었다. 각종 서류를 준비해야 했고, 절차도 복잡했다. 이모는 비자 변경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난감해했다. 나는 이모와 함께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관련 서류를 작성해드리고 비자 변경 문제를 도왔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오가는 정을 쌓고, 가족으로서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민지 엄마…아무래도 나 이번달까지만 일해야 할 것 같아. 둘째 딸이 한국인과 결혼해서 지방에서 살게 됐는데, 딸 옆에 가서 살고 싶어. 나도 이제 나이도 들고 딸 믿고 살아야 하는데, 딸이 옆으로 오라고 하니 그 아이 말 들어야지….”

 

올해 설 명절을 보낸 직후 이모께서 내게 이별을 통보해왔다. 딸과 떨어져 산 기간이 길었기에,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별 통보에 실연당한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거의 2년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셨던 분이다. 둘째 아이는 이모에게 강한 애착을 보였다. 최근에는 이모랑 자겠다며 엄마랑도 자지 않던 아이였다. 둘째가 새 양육자랑 잘 지낼 수 있을지, 이제까지 손발 맞춰 생활해온 사람을 떠나보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정도 주고 마음도 주고 그동안 나는 이모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가족이라 생각했으나 우리는 언제든 이별할 수 있는 계약관계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니 씁쓸하기만 했다. 심지어 ‘왜 나는 아이를 돌봐줄 시부모가 있는 서울 남자랑 결혼하지 않았나’ 하고 후회할 정도였다. 이모에게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같이 있어 달라 했지만 이모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동안 내가 해고를 통보하기도 했고, 어떤 이모는 먼저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그런 이별의 반복 속에서 직장맘의 비애가 느껴지고, 애꿎은 아이들이 불쌍했다. 이번만은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 함께할 수 있는 ‘우리 가족’을 만났다 생각했는데 내 기대는 무참히 꺾였다.

 

이모가 집을 떠나시는 날, 민지 아빠가 이모를 위해 직접 정성스레 상을 차렸다. 떠나실 이모와 새로 들어오실 이모(맨 왼쪽) 모두 함께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아이들은 이모가 가시는 줄도 모르고 이모에게 딱 달라붙어 해맑게 웃고 있다.

“이모 어디 가?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엄마 또는 이모의 비애

 

애를 때렸다더라 납치했다더라
각종 뉴스와 소문과 괴담
이모 블랙리스트까지 떠돈다
그러나 한편엔 진상엄마도 있다

 

“눈칫밥 먹느라 위염이 직업병
툭하면 무시하고 의심하고
사모님으로 불러주길 바라요
또 나에게 아이 데리고 자라면서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봐
애 아빠를 한방에서 재웠어요”

 

이모와 이별하는 날, 나는 새벽까지 잠을 못 자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모와 아이들,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지냈던 사진들을 골라 앨범을 만드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떠난다니 섭섭한 것인지, 또 다른 사람과 적응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해서 우는 것인지, 애착이 잘 형성된 주양육자와 너무 이른 나이에 이별을 해야 하는 아이들이 불쌍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둘째 아이는 이모와 이별할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는지 2주 전부터 이모에게 집착하고 분리불안 증세를 보였다. 이모 나가기 사흘 전부터 심한 열감기를 앓았다. 나 역시 새로운 이모와 적응하는 과정에서 심한 감기를 앓고 있다. 이모가 나가시는 저녁, 이모를 위해 남편은 소고기를 굽고 상을 정성스럽게 차렸다. 새로 들어온 이모와 나갈 이모,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밥을 먹었다. 이모가 짐을 싸들고 나가시는데, 이모를 꽉 한번 껴안았다.

 

“이모 놀러 오세요~ 건강하시고요!”

 

“그래요, 잘 지내고, 건강해요.”

 

아무것도 모르고 까불고 이모랑 평소처럼 장난치던 딸은 내가 눈물을 보이자 따라 운다.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모가 짐을 싸들고 나가니 이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모 어디 가?”

 

“이모 교회 가~ 이모 교회 가서 기도해야지~”

 

“나도 따라가면 안 돼?”

 

“……”

 

시끄러움과 부산함 속에서 우리는 눈 깜짝할 새 이별을 해버렸다. 아이들에게 영향이 있을 것 같아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있는데, 올해 6살 된 딸이 화장실로 들어와 서럽게 운다.

 

“엄마, 이모 보고 싶어. 이모 이제 안 오는 거야?”

 

딸을 꼭 끌어안아주고 딸의 감정을 보듬었다. “엄마도 이모 보고 싶을 것 같아”라고 말해주고 말없이 딸이 이별의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안아줬다. 한 5~10분 정도 시간이 흘렀나. 딸도 나도 눈물을 닦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딸에게 나는 말했다.

 

“민지야~ 이모랑 우리가 지금은 떨어지지만 아주 영영 헤어지는 것은 아니야. 이모가 보고 싶으면 전화도 할 수 있고, 우리가 한번씩 이모에게 연락해서 만날 수도 있어. 민지, 오늘 유치원에서 사랑반 선생님이랑 헤어졌지? 이제는 형님반으로 올라가면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지. 이렇게 누군가랑 헤어지면 또 다른 만남이 이어져. 민지 키워주신 최 이모랑 헤어졌을 때 우리 민지 많이 슬퍼했던 것 기억나? 그때도 너무 슬펐지만 방 이모 같은 좋은 이모를 만나서 우리 행복한 시간 보냈잖아. 그래서 슬픔 속에는 희망이 있고, 헤어지면 또다른 만남이 있는 거야.”

 

민지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이 말은 나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했다. 6살이 돼 제법 철이 들어서 그런가. 딸은 정말 집중해서 내 얘기를 들었다. 알 듯 말 듯 한 표정이었고, 딸은 금세 괜찮아졌다. 민규가 문제였다. 이모가 나가신 뒤 민규는 불안 증세를 보였고, 잠시도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나는 며칠 동안 회사에 휴가를 내고 아이 옆에 있어 주었다. 새로운 이모랑 적응하는 과정에도 시간이 걸릴 듯하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 가족이 감당해내야 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모가 떠나시고 일주일 뒤 전화를 했다. 이모는 민규가 꿈에 나오고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다며 울먹거렸다. 나도 “이모 가신 뒤 저도 민규도 많이 아팠어요”라고 말하며 울었다. 민규가 새로운 이모와 적응할 때 즈음해서 만남을 갖기로 기약하고 아쉽게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우리는 새로 들어온 이모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 우리 가족은 이렇게 ‘중국동포 이모’들과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 <한겨레> 육아사이트 ‘베이비트리’(babytree.hani.co.kr)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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